• 2023. 5. 28.

    by. 약방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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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릿 대처 수상은 영국의 71대 총리이면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이자 윈스턴 처칠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총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수식어를 붙게 해 준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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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클랜드의 지정학적 중요성


    포클랜드 제도는 남미 대륙의 남동쪽 끝에서 약 500km, 영국본토에서 약 13,000km 떨어져 있으며 남미와 남극대륙과의 근접성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클랜드는 남대서양 항로를 포함한 주요 해상 항로를 따라 위치해 있고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의 해상 교통로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위치로 어느 국가든 잠재적인 해군 작전과 해양 자원의 통제를 위해서도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클랜드는 또한 석유와 가스, 어업 등 다양한 천연자원과 어업자원이 풍부하고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적용하면 해안선에서 최대 200해리까지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기 때문에 풍부한 어장과 광물 매장지가 포함되게 됩니다.

     

    포클랜드를 통제함으로써 남대서양 지역으로의 전략적 발판을 제공할 수 있고 군사력 투사 및 인근 지역 영토에 대한 영향력 등 다양한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 영유권 분쟁이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는 섬과의 근접성과 역사적 연관성을 들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영국은 점령 역사와 포클랜드 섬 주민들의 자결권을 기반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군 병력도 100여 명 상주하고 있어 실효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양국 간 논쟁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클랜드 전쟁 발생원인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남대서양의 외딴 군도인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서 일어난 군사적 충돌입니다. 전쟁은 74일 동안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승리하여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포클랜드 전쟁 발생 원인은 역사적, 지정학적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소유권을 19세기 초부터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섬과의 근접성, 스페인 지배 이후 아르헨티나 정착지였다는 등의 역사적 연관성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고 영국은 1833년 영국군에 의한 포클랜드 섬에 대한 점령을 근거로 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 지역에서의 영국과 아르헨티나와의 긴장은 20세기 후반부터 고조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 장군이 군사독재를 지속하면서 아르헨티나의 국제 정치 및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는데 갈티에리는 이를 타개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포클랜드 섬의 주권을 주장하면서 군사적 승리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고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르헨티나 군대가 1982년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영토를 점령했고 100여 명의 영국 군인들을 몰아냈던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군부 입장에서는 영국군이 과거처럼 강력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13,000km나 떨어진 이곳까지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대처 수상은 가능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포클랜드 원정작전을 시행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작전경과 및 결과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군은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수도인 포트 스탠리를 점령하고 소규모 영국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 내면서 영국은 물론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해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을 포함한 해군함대를 남대서양으로 파견하였습니다.

     

    1982년 5월 영국 해군은 산 카를로스 전투에서 아르헨티나 해군과 해전을 통해 대승을 거두면서 섬에 쉽게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해상 및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지상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섬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1982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군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전쟁 결과 아르헨티나 군은 6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영국군도 2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으며 포클랜드 섬에 있던 민간인들도 다수가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전쟁 결과 아르헨티나 군부는 급격하게 무너졌고 결국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간 정부가 들어서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영국은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시켰고 대처 수상의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동시에 국제사회에 영국이 건재함을 과시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 교훈

     

    포클랜드 전쟁의 교훈을 군사 및 국제 외교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첫 번째 포클랜드 전쟁은 높은 수준의 군사대비태세와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입니다.

     

    영국은 처음에 아르헨티나의 위협을 과소평가했고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기습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정확한 정보와 분석능력은 잠재적인 적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대응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신속한 전투력 투사입니다. 영국은 현실적으로 대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상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신속하게 군사력을 투사하면서 아르헨티나 군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명확한 목적을 갖고 섬 탈환작전에 나서는 영국군과 대조적으로 아르헨티나 군인들 대부분은 왜 포클랜드 섬을 점령한 것인지 목적도 모르고 전투에 참가해서 영국군과의 전투에 의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국제 외교적 측면에서는 포클랜드 전쟁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상시 마찰이 있던 지역으로 외교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했다면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양국에 상당한 인명손실과 경제적 비용을 초래하지 않았을 겁니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지역 안보 협력의 중요성과 분쟁 예방 및 해결을 위한 조직의 역할이었습니다.

     

    1963년 체결된 아프리카 38개 독림국가들이 결성한 아프리카 연합(OAU)이 역할을 강화하는 등 동일한 지역의 안보와 분쟁을 중재하고 안정을 촉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구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습니다.